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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보는 세상

임천고치 산수훈에서[옮긴글]

by 한상철 2007. 3. 12.
산은 큰 물체[大物]이다. 그 형상이 솟아 빼어난 듯, 거만한 듯, 조망이 널찍하여 툭 터져 있는 듯,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듯, 다리를 펴고 앉아 있는 듯, 둥그스름하게 큰 듯, 웅장하고 호방한 듯, 정신을 전일하게 한 듯, 엄중한 듯, 눈이 예쁘게 뒤돌아보는 듯, 조회에서 읍하고 있는 듯, 위에 덮개가 있는 듯, 아래에 무엇을 타고 있는 듯, 앞에 의거할 것이 있는 듯, 뒤에 기댈 것이 있는 듯하게 해야 한다. 또 아래로 조감하면서 마치 무엇에 임해서 보는 듯하게 해야 하고, (上流人으로서) 아래에서 노닐면서 마치 무엇을 지휘하는 듯하게 해야 이것이 곧 산의 대체적인 모습이다.

물은 활동하는 사물[活物]이다. 그 형상이 깊고 고요한 듯, 부드럽고 매끄러운 듯, 넓고 넓은 듯, 빙빙 돌아 흐르는 듯, 살찌고 기름진 듯, 용솟음치며 다가오는 듯, 격렬하게 쏘는 듯, 샘이 많은 듯, 끝없이 멀리 흘러가는 듯하게 해야 하고, 또 폭포는 하늘에서 꽂히는 듯 하고, 급히 흘러 부딪히며 떨어져 땅 속으로 들어가는 듯, 고기 잡고 낚시하는 광경이 평화로운 듯, 초목이 무성해서 이들이들한 듯, 안개와 구름이 끼어 빼어나게 고운 듯, 계곡에 햇빛이 비치어 찬란한 듯하면, 이것이 곧 물이 활동하는 모습이다.

산은 물로써 혈맥을 삼고, 덮혀 있는 초목으로 모발을 삼으며, 안개와 구름으로써 신채(神彩)를 삼는다. 그러므로 산은 물을 얻어야 활기가 있고, 초목을 얻어야 화려하게 되며, 안개와 구름을 얻어야 빼어나게 곱게 된다. 물은 산을 얼굴로 삼고, 정자를 (얼굴에서 제일 비중이 큰) 눈썹과 눈으로 삼고, 고기 잡고 낚시하는 광경을 그 정신(물의 의취意趣)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물은 산을 얻어야 아름답게 되고, 정자를 얻어야 명쾌하게 되며, 고기잡고 낚시하는 광경을 얻어야 정신이 넓게 퍼져 환하게 된다. 이것이 산과 물을 (회화에서) 배치하는 양상이다.

산에는 높은 산도 있고 낮은 산도 있다. 높은 산은 혈맥인 물줄기가 아래에 있고, 그 모양이 마치 어깨와 다리를 한껏 벌리고 있는 듯하며, 산밑 언저리는 장대하고 두텁게 퍼졌으며, (그 주위에는) 봉우리들과 산굴, 둥그스름한 형세의 작은 언덕들이 감싸안는 듯이 서로 굽히면서 연결되어 있고, 빛깔이나 경치가 서로 비치고 어울림이 끊임이 없다. 이것이 높은 산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된 높은 산을 일컬어 '외롭지 않다'고 말하고, '엎드러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낮은 산은 혈맥인 물줄기가 위에 있고, 그 정상은 반쯤 떨어져 나갔으며, 목줄기에 해당하는 부분이 서로 연이어 있고, 산의 하부가 높고 방대하게 크며, 흙산이 울퉁불퉁하고 곧장 아래로 깊게 박혀 있어, 그 깊고 얕음을 측량하기 어렵다. 이것이 얕은 산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된 낮은 산을 일컬어 '지형이 수척하지 않다'고 하고, '새어버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높은 산이면서 외로운 것은 그 몸통이 엎드러질 이치가 있고, 낮은 산이면서 지형이 수척한 것은 산의 신기(神氣)가 새어버리는 이치가 있다. 이것이 산수의 이루어진 본새나 됨됨이이다.

바위란 천지의 뼈에 해당한다. 뼈는 단단하고 깊이 묻히어 얕게 드러나지 않는 것을 귀히 여긴다. 물이란 천지의 피에 해당한다. 피는 두루 흐르되 엉기거나 막히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산에 안개와 구름이 없다면 마치 봄에 화초가 없는 것과 같다. 산에 구름이 없다면 빼어나지 못하고, 물이 없다면 아름답지 않으며, 길이 없다면 활기가 없고, 나무와 숲이 없다면 생기가 없다. 또 심원(深遠)이 없으면 얕게 보이며, 평원(平遠)이 없으면 가깝게 보이며, 고원(高遠)이 없으면 낮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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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산수의 계곡은 멀리서 바라보고 그 세(勢)를 취하고, 가까이 보아서 그 질(質)을 취해야 할 것이다.

실제 산수의 구름기운은 네 계절이 같지 않다. 봄에는 수증기가 위로 오르게 보이고, 여름에는 자욱하고 왕성하게, 가을에는 성글고 얇게, 겨울에는 어두컴컴하고 담담해 보인다. 그림에서는 그 대체적인 형상을 나타내되, 새겨놓은 듯이 명확한 형태를 그리지 않아야 구름기운의 모습이 생동하게 된다.

실제 산수의 안개 낀 모양도 네 계절이 같지 않다. 봄 산은 담담하고 예쁘면서 미소짓는 듯하고, 여름 산은 무르녹게 푸르러 흠씬 젖은 듯하며, 가을 산은 해맑고 깨끗해서 단장한 듯하고, 겨울 산은 참담하여 잠자는 듯하다. 그림에서 그 큰 뜻을 나타내고 각획한 것 같은 필적을 보이지 않으면, 안개 낀 경치의 형상은 바로 되는 것이다.

또 실제 산수의 비바람은 멀리 바라보면 알 수 있으나 가까이에서는 잘 보아 익혔더라도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일어나고 그치는 형세를 다 규명해낼 수는 없다.

또 실제 산수의 흐리고 갬도 멀리서 바라보면 다 알게 되지만, 가까이에서는 좁은 시야 안의 물상에만 사로잡혀 명암과 나타났다 숨었다 하는 자취를 분명히 파악할 수 없다.

또 산속의 인물은 길이 있다는 표시이고, 산의 누각과 도관(道觀)은 뛰어난 경치라는 표시이며, 숲의 나무를 분명하게 하거나 가리우게 배치한 것은 원근을 구분함이요, 산의 계곡을 끊었다 이었다 한 것은 지세의 깊고 얕음을 구분한 것이다.

물에 나루터와 다리가 마련됨은 인간의 생활사를 나타내는 데 족하고, 물에 고깃배와 맊싯대가 보임은 인간의 의도를 나타내기에 족하다.

큰 산은 당당하게 뭇 산의 주인이 된다. 그러므로 주위에 산등성이와 언덕, 숲과 골짜기 등을 순차적으로 분포함으로써 원근과 대소의 수령이 된다. 그 형상은 마치 천자가 빛나게 남쪽으로 향하고 있고 모든 제후들이 조회하기에 분주하지만, 조금도 (천자가) 거만하거나 (제후가) 배반하는 듯한 기세가 없는 것과 같다.

커다란 소나무는 꿋꿋하게 뭇 나무들의 지표가 되다. 그러므로 주위에 온갖 덩굴과 초목들을 차례로 분포함으로써 이끌리고 의탁하는 자들의 장수가 된다. 그 기세는 마치 군자가 뜻대로 때를 만나 모든 소인들을 불러 일을 시키지만 (군자가) 세력을 믿고 능멸하거나 (소인이) 걱정하며 낙망하는 듯한 태도가 없는 것과 같다.

산은 가까이에서 보면 이러이러하고, 멀리 몇 리쯤 떨어져서 보면 또 이러이러하고, 멀리 십여 리쯤 떨어져 보면 또 그 정도로 이러이러하다. 거리가 멀어질 때마다 달라지므로 이른바 '산의 모양은 걸음걸음에 따라 바뀐다'고 한다.

또 산의 정면은 이러이러하고, 측면 또한 이러이러하고, 뒷면 또한 이러이러하여서 볼 때마다 달라지므로 이른바 '산의 모양은 한면한면씩 보아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산은 하나이면서 수십 수백의 형상을 겸하고 있으니, 이 점을 터득하지 않고서야 다 알 수가 있겠는가!

또 산은 봄 여름에 보면 이러이러하고, 가을겨울에 보면 또 이러이러하니, 이른바 '사철의 경치가 같지 않다'고 한다. 또 산은 아침에 보면 이러이러하고, 저녁에 보면 또 이러이러하며, 흐린 때나 개인 때에 보면 또 이러이러하니, 이른바 '아침 저녁의 변하는 모습이 같지 않다'고 한다. 이와 같이 되면 산은 하나이면서 수십 수백의 산의 뜻과 모습을 겸한 셈이니, 이를 터득하지 못하면 궁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봄 산은 안개와 구름이 끊이지 않고 감돌아 사람의 마음이 즐겁고, 여름 산은 좋은 나무들이 번성하여 그늘이 짙으므로 사람의 마음이 넓고 편안해지며, 가을 산은 해맑으나 낙엽이 흔들리고 떨어져 사람의 마음이 엄숙한 느낌을 갖게 되고, 겨울 산은 어둡고도 흐리고 눈비바람에 흙비로 (길과 골짜기가) 막혀 있어 사람의 마음이 적적해진다.